No comments yet

참 영원 구원 보장 / W.T.PURKISER. Ph.D 저

참 영원 구원 보장 / SECURITY THE FALSE AND THE TRUE by W.T.PURKISER. Ph.D

1.머리말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는 자신의 안전 보장의 사실에 대하여 마음속에 의문이 없다.
참 그리스도인의 구원 안전 보장은 완전하고 온전하며 부족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 안전 보장의 본성에 대한 매우 거짓된 것들이 있음으로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들이 퍼져있다.
거짓 구원 안전 보장은 그것이 태만과 안일을 낳는 까닭에 전혀 없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
신자의 구원 안전 보장을 말 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죄를 허용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망치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다.
타락한 자에게 개인적인 회개나 주께 돌아옴이 없이 그의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는 교리는 어떤 것이든 거짓 안전 보장이다.
불행하게도 “영원구원 안전보장” 이라 알려진 것을 가르치는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하고 있는데, 그들의 여러 글의 인용구들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르침은 위험스러우며 비 성경적이다.
참 구원 안전 보장은 그와 같은 가르침을 완전히 거절할 것을 요구한다.
권위자들을 열거하려고 한 것은 아니며, 매 구절마다 조심스럽게 따옴표로서 인용구들을 옮겨 놓았다.
우리의 주된 소원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는 것이다.
모든 성경 인조는 흠정역에서 인용했다.
우리가 위대한 안전 보장의 약속들을 공부하라고 제안하는 것은 그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안전히 안내하고 뻔뻔스러운 죄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도록 하는데 있다.
“주의 말씀을 내가 내 마음에 감춘 것은 내가 주께 범죄치 않으려 함이라.”(시편 119:11)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된 참 구원 안전 보장을 알게 될 것이다.
각기 다른 대조적인 견해들이 나올 때 논란이 따르나 우리의 소원은 논쟁을 벌이는데 있지 않다.
이 책자의 제목은 H.A.아이론사이드 박사의 저서 “성결 : 거짓과 참”이란 책과 이것에 답한 H.브로켙 의 저서 “죄로부터의 성경적 자유”란 제목의 분명한 의역이다.
아이론사이드 형제는 웨슬리적 성결 교리를 믿지 않으며, 나도 또한 그의 구원 안전 보장 학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구원 안전 보장 문제에 대한 더욱 완전한 조사가 R.A.센크에 의하여 “성자 안에서의 생애”라는 제목이 붙은 책에서 다루어졌다.
전통적으로 영원 구원 안전 보장이라 알려진 교리를 밀어주는 복음적인 그룹들에서 나오는 이 이론에 대한 철저한 논박은 더욱 인상적이다.

2.양들은 누구인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27-30)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안전 보장의 약속 중 하나이다.
이 구절의 모든 말씀은 장엄한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하나인데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여기에는 어리석은 두려움을 위한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양들의 편에서 불안을 가질 아무런 구실이 없다. 인간들에게는 실패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는 결코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지 우리의 소원에 맞추기 위해서 변경시켜서는 안 된다.
주 안에 있는 양들에게 절대적 안전 보장이 확실하다. 그러나 또 다른 절대적 선언이 여기에 있다. 그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다른 선언(말씀)을 먼저 하셨는데, 그것은 그 말씀에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이 나의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고,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천국 은행의 쇠하지 않는 재원에서 끌어난 수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신자가 서명을 할 수 있고, 액면 그대로 현금을 지불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곁길로 벗어난 자와 다른 양들은 그 약속에 따라 현금 지불을 위해 노력할지라도 안 되는 것이다. 그 현금을 지불하는 자는 결코 위조된 서명에 속지 않는다. 아무도 “성도의 고집”에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죄인들의 고집”인 것이다.
아무도 거짓 안전 보장을 목적으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인 “내 양은 나를 따른다”는 말씀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를 따르는 자는 그 양들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를 따르지 않는 자는 아무리 큰 소리로 음매 음매 울지라도 그리스도의 양은 아닌 것이다.
더욱 이 모든 말씀은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다.
“그들이 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나를 따르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 자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이나 성경의 어떤 말씀 중에서도 과거에 어떻게 했던 간에 지금 주를 계속해서 따르지 않는 자에게 거짓 신뢰를 주고 있는 곳은 없다.
우리는 어떤 이들이 그러하듯이 “스스로 멸망하기 위해”(베드로후서3:16) 성경 말씀을 뒤틀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구절을 “그들이 한 때 나의 음성을 들었었고, 나를 따랐었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라고 바꾸어 쓸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
아무리 상상력을 통해서 고집할지라도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킬 도적을 따라가는 빗나간 양들과 방황하는 양들에게 안전 보장을 준다고 이 본문 말씀이 적당히 상상될 수 없는 것이다.
간결하게 논리적으로 써 본다면 다음과 같다.
안전 보장을 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양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다.
그런고로 그를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은 안전하지 않다.
요한복음 10장은 양과 염소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염소가 양이 될 수 있는 반면 양은 결코 염소가 될 수 없다고 논란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양들과 그 양이 아닌 다른 양 무리와의 대조가 되어 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에 대하여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마 10:6, 15:24), “잃었던 나의 양”((눅 15:6)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를 따른다는 사실에 차이점이 있다. 다른 양들은 그렇지가 않다.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참된 안전 보장이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그의 양무리가 아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그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위로가 없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우리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2:21-24)

3.분리에 관하여는 어떤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5-39)
이 말씀은 또 다른 안전 보장에 관한 엄숙한 말씀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늘 위에나 땅에나 음부에서도 영혼과 구주 사이에 쐬기를 박을 수 있는 힘이나 영향들이 없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 안전 보장을 가르치도록 되어져서는 안 되겠다. 이사야 59:1-2의 말씀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라고 하였다.
죄는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요, 유한한 의지의 행동이다. 이것은 영혼의 자살이지, 죄는 결코 강제로 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이 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약속하는 안전 보장을 격려하는데 이용되는 것은 성경학에 대한 익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1-4)고 우리가 읽게 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육을 따르지 아니하고 성령을 쫓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게한 자들과 “율법의 의가 이루어진 자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14절에서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인도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진다.
죄 중에 사는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인도되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적이 있었으나 그가 죄 중에 산다면, 그는 하나님께 건짐을 받아야 하는데 그가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게 되리라고 위로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죄가 영혼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다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한 분명한 가르침이다.
요한 이서 8,9절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예수님 자신은 제자들에게 온전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일러 주셨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한복음 15:2,6)
이것들이 참 가지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하늘로 데려간다고 말하는 것은 온전히 넌센스다.
어떤 거짓 안전보장의 가르침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무디게 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22절에서 같은 말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죄가 영혼을 구주로부터 갈라놓는다는 사실을 수정처럼 분명히 하고 있다.
두 개의 기억할만한 성구들이 있다.

첫째는 히브리서 6:4-6이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어떤 이들은 이 분명한 진리의 말씀에서 엄청나게 곁길로 멀리 가버린 자들도 있다.
흥미 있는 고안은 비록 비췸을 받았고 하늘의 은사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일지라도 전적으로 구원 받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맛보았다”는 말은 예수님께 대한 히브리서 2:9의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았다”는 말과 같은데, 그것은 “전적인 경험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또한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졌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더 말하면 그들은 회개 했었다. 그래서 그 표현은 “그들은 다시 회개토록 새롭게 하기 위하여”로 되었다.
성숙치 못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어떤 말로 묘사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은 이 말씀이 일어날 수 없는 어떤 것을 관계시킨 가정적인 말이라고 한다. 이 반대는 물론 첫째의 논점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느 곳에도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것을 위하여 그러한 강조를 한 곳이 없다.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을 어째서 경고할까?
그 말씀은 타락에서 가능한 회복을 위한 신앙과 부합될 수 없다고 말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반대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라는 것과 사도가 말한바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의 죄로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자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되게 하는 자를 다시 회개케 하기는 불가능하다고한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원어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분명한데, 두 동사가 현재 분사형이다.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중단한 자와 그를 욕되게 하는 것을 중지한 자에게 회복이 거절된 것이 아니다. 회복의 불가능은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동안 계속된다.

두 번째 중요한 능력 있는 경고의 성구는 히브리서 10:26-29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헬라어-죄를 짓고 있는 중)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여기서도 동사의 시제는 현재이다.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범하는 죄들을 위한 제사가 없다.
죄의 질병에는 오직 한 대책만이 있다.
우리가 그 대책을 일축하는 동안 우리에게는 회복의 가망이 없다. 만일 당신이 한척의 배 밖에 없는 섬에 있었다고 하고, 그 배에 타기를 거절했다면 당신은 좀처럼 그 섬에서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타락(믿음에서)자들은 이사야서 55:7의 은혜로운 약속을 가지고 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알아야할 중요한 점은 진리의 지식을 받고, 약속의 보혈로 말미암아 정결케 된 자들이 돌아가 짐짓 죄를 짓게 되면 그러한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주 예수의 구속하시는 은총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취급하는 것이요, 복음을 처음 듣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영접하는데 실패한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형벌로 정죄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25에서 말하기를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유다가 간 제 곳이 하늘 나라였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이는 유다는 결코 구원받지 못했었다고 하여 그들의 이론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 두 논쟁은 서로 상치된다. 둘은 다 잘못이다. 예수님은 유다에 대하여 요한복음 17:12에서잃어 버렸다고 하셨다.
그의 제 곳은 결코 천국이 아니었다. 만일 유다가 처음에 참된 제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제자로 믿을 이유가 없다. 만일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타락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유다가 결코 참 제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 말씀이 베드로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오직 죄와 범죄가 끊을 수 있다.
우리는 바울처럼 말할 수 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전서 15:56,57)

4.자녀권과 죄

영원 구원 보장에 대한 성경 교리를 살펴보면 죄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자녀권에 관한 문제에 곧 직면하게 된다.
“나는 매일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짓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짓는 이것은 사탄 자신도 이 이상 더 죄를 짓게 하지는 못하는데, 매일 죄 짓게 하는 이상으로 더 자주 죄짓게 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인간 한계의 일부분인 과실과 결핍, 실수 그리고 연약성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님을 언급해 두어야 하겠다.
우리는 “죄”라는 용어를 우리의 힘으로 피할 수 있고, 행할 수도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요구한 알려진 어떤 것을 범하거나, 태만해서 지키지 못한 것에 관련된 것으로 전체 신약 성경의 문맥에서 사용될 수 있는 의미로만 사용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인데, 만일 공인된 그리스도인이 죄 가운데 빠지면 그것은 그가 결코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된다면 이 교리가 참된 것이 아닐 수 있겠으나 적어도 그것은 해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원 구원 보장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이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자녀가 죄된 생활에 빠질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배반하는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사실로 인해 궁극적인 구원이 보장된다고 한다.
이 가르침의 대부분이 부자(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잘못된 적용에 기인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13에서 우리는 잘못된 유추의 위험에 대해 조심할 것과 반면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는 말씀을 듣고 있다.
“한번 자녀이면 항상 자녀이다”라고 주장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은유는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애당초 우리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진노의 자녀”(엡2:3)와 “마귀의 자녀”(요일 3:10) 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가정에 한번 태어나서 그 가정의 자녀가 되는 것을 그만두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불순종의 자녀가 되어야만 한다.
“한번 출생하면, 출생치 않은 자가 결코 될 수 없다”고 우리는 또 듣고 있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출생에 대한 논리적인 정반대는 다시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다. 자녀는 죽을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자녀였다.” (눅3:38)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셨다. 거짓 안전 보장이 에덴동산에서 까지 일어났는데, 이는 뱀이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고 확언한 것이다. 자기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허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탕자가 여전히 아들이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죽었었고, 잃어버렸었다(눅15:24,32)고 말씀하셨다. 어느 점에서는 죽은 아들이나 잃어버린 아들이 전혀 아들이 아닌 것보다 더 났지 않겠는가?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19,20)고 말하고 있다.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해서 주의 깊게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죄에 빠진 자들이나 혹은 죄 가운데 계속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궁극적인 구원이 아직도 보장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그러한 가르침은 에스겔 13:22의 말씀과 같이 “생명을 그에게 약속함으로 악인의 손을 굳게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일반적으로 “타락자”로서 알려진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결코 “진전이 없는” 타락자에 속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종교는 단지 인간의 개혁 문제였다. 물론 이런 자들은 여기서 우리에게 관계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았었다고 하나 그들의 생애를 위한 알려진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떠나 있다고 확신되는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죄를 지을 때 벌하시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John R. Rice-“구원받은 사람이 잃어버릴 수 있을까?”(p16)
그리고 또 “한 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불쌍한 죄인이 새 생명과 새로운 성품을 받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범했던 모든 것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잃어버린 자로 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주장되고 있다. H.A. Ironside-“신자의 영원 구원 보장”
질문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 가운데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죄 가운데 사는 자(타락자가 하는 것처럼)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런 자가 구원받은 자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답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보자.
그리스도께 대한 첫 번째 소개가 천사가 일러준 말 중에 있는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는 말씀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죄 중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생각을 위한 어떤 성경적 근거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인간의 도덕성은 영적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유일한 징후라 하셨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8-20)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던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12:33)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죄 가운데 살 수 있다는 사상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4-16)
그러나 바울은 “불” 가운데서 구원 받은 자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없어질 재료로 지은 자들은 일의 공력에 대한 상을 잃어버리되 그러나 그들 자신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이 죄의 생활이 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 아님을 바로 그 다음 두절에서 그가 계속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갈라디아서 5:19-21에서 바울은 육신에 속한 일들에 대해 우리에게 나열해 주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보다 추잡한 죄들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더 품위 있는 종류의 거도 있다. 시기, 분냄과 분쟁, 투기, 원수를 맺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부언하기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다.
또 다른 유사한 경고가 에베소서 5:5-7에 나타나 있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여기에는 한 때 신자가 되었던 자들에 대한 예외가 없다.
그러한 죄들에 참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철저한 보장이 있을 뿐이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범죄 하기를 쉬지 아니하는”(14절),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혼에 대하여 기술한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후서 2:18-22절에는 교회 안에서의 거짓 교훈에 대한 무서운 결과들이 강력한 말로 묘사되고 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 다시 얽매인 자들과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자는 그 나중 형편이 처음 보다 더 악화됨을 발견한다.
결코 출발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그들에게는 좋았을 것이다.
죄의 생활과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양립될 수 없는 강력한 진술들을 요한일서에서 찾아보게 된다.
다른 신약성경 기자들은 의문을 남기지 않았지만, 사도 요한은 다소 놀랄만한 방법에서 우리 시대의 거짓 안전 보장과 닮은 이단과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죄가 자리 잡는 곳이요 원천이라 육체적 본성이 부패하고 죄를 지어도 영혼은 구원 받을 것ㅇ이며, 깨끗하리라고 가르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요한은 노스틱 주의의 괴변을 거짓 고백이요, 조직적인 거짓말로 간주했다. 그가 그것에 대해 말 한 것은 중생한 자가 죄 가운데 살거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더라도 과거의 중생한 경험 때문에 미래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시사한 어떤 가르침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그 다음 구절도 방금 말한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7절에서와 같이 깨끗함을 받아야 할) 스스로 속이고”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 서신의 전체 목적은 “죄 짓는 성도”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한 생각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1)
순간적인 죄에 빠졌다가 즉시 그 죄를 끊고 다시 반복하지 않는 영혼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마련(조처) 조차도 죄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 97, 98)
“만일(아니나, 범할 때)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1,2)
헬라어 원어는 요한이 “매일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강한 유혹의 압박 아래서 감정에 끌려 어떤 죄에 빠진 자들이 곧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끊어버려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신 대언자에게 봉사하도록 그런 영혼에게 요한은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끊어버린 이와 같은 죄는 단지 아버지 하나님과 순간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만일 죄를 반복하고 합리화 시키면 더 큰 비극적 결과들이 따라 오게 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불의한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는 위안을 주지 않는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4)
요한에 의하면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적 경험은 속임수요 협잡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5,6)
또한 요한은 죄 가운데 사는 자들(타락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이며 철저한 해답을 주고 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8,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요일 3장9절에 있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이 말씀에 어떤 사람들은 확실히 당황할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 정직함과 도둑질하는 것, 애국심과 반역이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씨와 죄의 원리는 논리적으로 상반되는 특성들이다.
진실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은 거짓말을 짜내는 입술과 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만일 그가 거짓말을 하면 그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이 도둑질을 할 수 없는 것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가질 욕망과 손과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만일 그가 도둑질을 하면 그는 정직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국자가 반역을 꾀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신체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만일 그가 반역적인 행위에 가담하게 되면 그는 애국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어느 곳에도 진실된 거짓말쟁이, 정직한 도둑, 충성스러운 반역자와 같은 그러한 피조물은 없다.
요한의 뚜렷한 말 속에서도 하나님의 우주 안에 죄 짓고 있는 성도는 없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상반되는 용어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달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된다. 여기서 영원 구원 보장에 대한 교리는 불가능한 궁지에 봉착한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사람은 죄 가운데 빠질 수 없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의식적으로 반역하며 살 수 없다고 타락이 불가능한 것을 확언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분명하고도 자주 반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전자를 택할 경우 사실상 그 교리의 실질적인 뜻이 무의미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면 당신은 참으로 구원받았고, 그렇지 않으면 먼저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새로 회심한 자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죄와 자녀됨이 양립될 수 있다는 사상을 보통 취하는 것이 둘째 선택이다.
반대로 참된 안전 보장은 죄로부터 구원하고 성결케 하며 지켜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족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 2:11-14)
참된 안전 보장은 어떤 사람이 회심할 때 적(敵)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이점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타조처럼 모래 안에 그 머리를 파묻지 않으며, 영혼에 대한 어떤 실제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현실주의가 방심하지 않게 하며, 매일 매일의 도움과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그 힘은 더욱 크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능히 너희를 보호하사”(유21,24)라는 말씀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이중적 안전 보장을 표현하고 있다.

5.믿었었다 인가, 믿고있다 인가?

성경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세부적이며 정확한 책이다.
이것은 특히 성경에 쓰여진 동사의 시제를 보아 알 수 있는데, 성경 기자들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는 현재 시상으로 행동을 결코 쓰지 않았다.
이것은 특별히 신약성경에 나타난 구원하는 믿음에 대한 많은 참조 성경구절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거의 예외가 없이 그것들은 주어진 시간에 시작된 어떤 것이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현재 시상으로 되어 있다.
많은 예가 주어져 있는데, 요한복음에 있는 몇 개만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요한복음 3:16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현재시상, 믿고 있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현재시상, 듣고 있는),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6:35 “나를 믿는(현재시상, 믿고 있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
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살아있는) 나를 믿는(믿고 있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 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거짓 안전보장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현재시상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과거시상으로 바꾸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의 하나로 요한복음 5:24를 인용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를 “만약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영원히 계속될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소유하고 그 영생을 잃지 않을 것이다.”로 말하고 있다.John R Rice op. cit. p.17
하나님의 현재시상을 인간의 과거시상으로 대치시키는 것은 하찮은 것 같이 보이지만 성경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얼마나 바꾸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은 “만약 너희가 믿고 있었다면”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만약 너희가 믿고 있다면”으로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그 뜻에서 완전히 정반대이다. 과거시상 대신 현재시상에 대한 이 조심성 있는 사용이 우연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감 받은 기자들이 뜻하지 않았던 것을 썼다고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앙의 한 단순한 행위가, 무엇이 뒤따르든지, 영생을 확고하게 보장하며, 상실되지 않고 지불되는 생명 보험 정책과 같다는 이 가정에 대해 조사해 보아야만 한다.
참 안전보장은 그것이 현재시상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현재의 믿음(히브리서 11:6)이며, 영생을 보장하는(요한일서5:10-12) 것이라는 성경적 확신에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자란 지금 믿고 있는 사람이지, 과거 어느 때에 믿었던 사람이 아니다.
믿는 것은 과정이며 계속적인 행동이다. 어릴 때 산타크로스를 믿었었다는 그 사실이 현재 성 니크(St.Nick)를 믿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생의 흐름 중에 변할지 모르는 영혼의 태도와 행위를 나타낸다.
한때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이 그의 과거 때의 믿음에 의해 궁극적인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을 제시해 주는 성경구절은 아무데도 없다.
이것과 관련해서 에베소 1:13절이 흔히 잘못 인용되고 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이 의지함과 믿는 것을 그쳤거나 그칠 수 있었으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인치심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사실은 에베소서 4:30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면서 인치심은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를 나타낸다는 생각을 분명히 배격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구원을 보장하는 현재시상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에 대한 경고의 구절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8:13에서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위 위에서 빨리 싹이 나는 씨앗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8:31의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는 말씀에서도 심지어 과거에 믿었던 자들도 만약 그들이 그의 참 제자들이 되려면 그들은 계속 믿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요한복음 3:18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저를 믿는(믿고 있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믿고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헬라어, 믿는 것을 지속하는 상태에 있지 아니한 자)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누가복음 12:42-47에 기록된 예수님의 위대한 비유들 중 하나에서 예수님은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자는 복을 받아 주인이 가진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믿지)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라고 했다.
이것은 “종들에 관해 말한 것이지 자녀들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지워버릴 수 없을 것이다.
축복을 받은 종과 정죄를 받은 종과의 유일한 차이점은 신실성에 있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정죄 받은 종은 “불신자가 받는 율을 받는다.”
첫 믿음 보다 더 좋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 시몬의 이야기 중에 나타나 있는데, 사도행전 8:13에서 그는 믿었고 세례도 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후에 교회에서의 직분과 권력을 바라는 그의 욕망 때문에 베드로에게 자신과 자기 재산이 멸망당하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충고를 받게 됐던 것이다(21,22절).
로마서 11:20-22에서 바울은 계속적인 신앙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이것은 이방인 교회에 한 것이지 개인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초점을 잃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그리고 교회는 그 개인 구성원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끊김을 당할 때를 제외하고는 믿음을 잃어버릴 수 없으며 끊김을 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1,2)
여기에서 제자들의 입장은 계속적인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 명백히 언급된 것이다. 이것이 실패하면 그들의 처음 믿음은 헛것이며, 그 첫 믿음이 궁극적 구원을 보장했다고 결코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4).
바울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골로새 1:22,23) 말하고 있다.
또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인내에 관해서 바울은 말하기를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함이라”(살전3:5)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구원이 귀착되게 하는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므로, 바울은 그들의 구원하는 믿음의 첫 단순한 행위가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이르게 하는데 필요한 전부라고는 분명히 믿지 않았다.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첫 서간에서 그는 한 때 믿었고 그리고 신앙을 저버리도록 시험을 받고 있는 자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한 때 그리스도를 믿은 것”으로 그들이 잃어버린바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디모데전서 1:18-20).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디모데전서 4:1).
젊은 과부들이 접하게 되는 사회적 악들이 다음의 경고를 받게 됐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디모데전서 5:11,12,15).
디모데 자신에게 말하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딤전 6:12)라고 하고 있다.
분명히 영생은 디모데가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고 주장되지 않는 한 중생 때 인쳐지는 미리 준비된 일은 아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히브리서 기자도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브리서 3:12-14, 6절 참조). 이들은 3:1절에서 말한 “거룩한 형제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계속적인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원 구원보장을 실제로 포기하는 것이다.
만일 그토록 떠난 자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지 못했다면 항상 속아왔다는 것을 그에게 보이지 아니하게도 되는, 그가 장차 상실할 수도 있는 믿음 안에 사람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보장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0:38,39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여기서도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 구원의 기초가 되어 있다.
살아있는 참 믿음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삶의 성격이라는 사실에서 마지막 요점을 찾아 볼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죄 가운데 거하면 그는 분명히 거짓 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우리 신앙의 실제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데 달려있지 아니하고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삶의 도덕성이 우리가 믿고 있는지 아닌지 혹은 속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최후의 테스트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야고보서 2:17,20).
진정한 안전보장에서 구원하는 믿음은 역사적인 한번의 행동이 아니라, 현재시상이며, 현재 까지 계속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달려있다.
모든 신자들은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생명은 그가 살아가는 신앙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참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믿음의 방패이다(에베소서 6:16).

6.자유롭고, 온전하며,궁극적인 구원

일시적 구원과 궁극적 구원이 하나가 아니며,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일시적으로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이 그 사실로 인해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뒤받침이 없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시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궁극적인 구원이 초기적 구원하는 신앙과 은혜의 경험에 의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로마서 13:11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믿는 것은 일시적 구원을 가져온다. 계속적으로 믿는 것이 궁극적 구원을 보장한다.
베드로전서 1:5,9과 13절에서 성령에 감동된 기자는 신자들의 현재적인 소유물이 아닌 구원을 말하고 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3번이나 나타나 있다. “나중 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22, 24:13. 마가복음 13:13)
예수님은 불법이 성행하고, 교회에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점차적으로 식어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날에 대하여 말씀한 것이다.(마태복음 24:12)
바울은 자기의 여러 가지 임무를 계속해서 완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디모데후서 2:10-12)
13절에서 또한 말하기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든지 안 믿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여 그가 말씀하신 것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택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선택에 대한 성경적 교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영생으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믿음에 보태져야할 은혜들을 열거하면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베드로후서 1:10).
하나님의 은혜의 무상의 선물인 구원은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업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이 구원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완전하며, 온전하게도 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브리서 7:25).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데살로니가후서 2:13).
“믿음의 결국”(베드로전서 1:9)인 궁극적 구원은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것”(베드로전서 5:4)이다.
궁극적 구원에 대한 약속은 이기는 자에 대한 것이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요한 계시록 3:5)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현재적 구원이 필연적으로 궁극적 구원을 보장했다고 생각될 수 있다면 분명히 사도 바울도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는 고린도전서 9:2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은 ‘허락되지 않은 것’을 뜻하고, 단지 자신의 업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아무도 말 할 수 없다.
그는 위에서 “던져 버리다”란 말로 번역된 꼭 같은 말을 쓰고 있는데, 로마서 1:28에서 그것은 “버림을 받다”로 번역 되었다.
고린도후서 13:5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다.
디모데후서 3:8 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고 했다.
디도서 1:16 에서는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했다.
위의 각 경우에 그 말씀은 잃어버린 자들을 표시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서 14:15에서 그는 말하기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고린도전서 8:10-11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 두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가 우리로 인하여 자신의 죄책감에 타협을 하게 된다면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베드로는 이와 유사한 것으로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부언하기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베드로후서 3:17)고 했다.
흔히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자녀가 잃어버린바 되면, 하나님의 신실성이 실패하는 것이며, 그의 구속 목적은 좌절되어질 것이라고 한다.
사실인즉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이 만일 구원받게 된다면 하나님의신실성은 실패하게 된다.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할 아담 후손의 모든 자녀를 구원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 후서 1:8,9)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이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위에 기초를 두었을 때의 영원 구원 보장 교리는 제한된 속죄를 믿는 신앙이거나 아니면 사람의 보편적 구원을 믿는 신앙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의 순수성이 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는 모든 자들을 영원히 구원 받도록 하셨다는 사실로 그의 신실성에 어떤 변화가 없으신 것이다.
만일 일시적 구원과 궁극적 구원이 동일하지 않다면 영생에 대한 우리의 확증은 어디에 놓이는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 2:10).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요한 계시록 3:1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요한 계시록 3:21)
참된 안전 보장은 궁극적 구원의 확증의 수단으로서 전적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적 구원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온전히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로마서 8:21). 또 그것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하는 것” (로마서 6:6)을 뜻하며 “성령으로 충만히 채움 받는 것”(에베소서 5:18)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는 것”(히브리서 12:14,15)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참된 안전 보장은 이 길 안에 있는 것이다.

7.영생의 의미

영생에 대한 많은 은혜로운 약속들이 성경에 있다.
이들 중에 몇 개는 주로 장래 상태에 대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다른 것들은 현재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서의 영생을 말하고 있다.
이미 요한복음으로부터 이와 같은 성구들을 인용한바 있다.
이들 약속들은 거짓 안정보장 교리를 가르치는 근거로 되어 버렸다.
영생은 끝이 없기 때문에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는 결코 잃어버린바가 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생명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되고 있다.
값비싼 진주가 부주의하고 거만한 주인에 의해 잃어버려졌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진주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반문하고 싶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영생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것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있는 것이다. 심각한 질문은 죄 가운데 사는 자가 한 때 믿었기 때문에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1-3)고 했다.
또한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한일서 2:4)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생명의 질에 대한 근본적인 언급이지 생명의 지속에 관한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의지는 의식 상태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래서 이들이 영적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둘째 사망”이라 불려진다.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한이서 9).
그러므로 영생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나 그리스도 임재에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본성대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디모데전서 6:16)이 있다.
우리의 불멸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되며,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다.
사람의 과거 상태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물론 살아 있는 존재는 죽는 것이 분명하다.
로마서 8:1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다.
이것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 아닌 것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브리서 9:27)라고 한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 죽음인데, 영적 죽음의 계보가 야고보서 1:14-16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오직 각 사람(그리스도인 포함)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영생을 주시는가?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8:51)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로마서 2:6,7)라고 바울은 대답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브리서 5:9)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한일서 2:24,25)
이것은 윤곽이 뚜렷하면서도 명백한 해답들이다.
누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장차 소유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자,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계속 인내로서 구하는 자, 주님께 순종하는 자, 아들과 아버지 안에 계속 거하는 자들이다.
만일 모든 신자들이 양도할 수 없는 궁극적 구원의 선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영생을 취하라”(디모데전서 6:12)고 한 디모데가 권고 받은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는 말임을 이미 상고했다.
이것보다 더 분명하게 요한은 말하기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 3:15)고 했다.
성경에서 가장 엄숙한 말씀 중의 하나는 요한일서 5:16절로서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거짓 구원 보장을 가르치는 자들이 단언하는 대로 문맥으로부터 이 구절만을 완전히 떼어내 가지고,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신자들의 생활 가운데서 그들의 죄가 너무 심각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이 땅 위에 계속 사는 것을 허용하실 수 없다는 죄의 결과로서의 육체적 사망만을 말한 것뿐이다”라고 말하여질 수 있다.
이 가르침을 옹호하는 주목할 만한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너무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까닭에 땅에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을 허용 받을 수 없어 사망에 의하여 데려감을 당한 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받았음으로 천국으로 가기에 합당하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이 하나님이 마음을 너무도 거슬리는 때문에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도록 허용될 수 없다.” August Van Ryn, 요한의 서간들. (1948)
성경을 너무 왜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려는 사람의 생각을 신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구절에 대한 요한의 전 관심은 영생(요일 5:11,13,20) 즉 영혼의 생명이요( 요일 5:12)이요, 죄로 인해서만 항상 잃어버리는 생명(요일 5:16)이다.
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요한일서 3:1-3절에 있는 소망 안에서 기뻐하고 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절에 있는 분명한 말씀, 즉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리스도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 말씀을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논리학에 가장 초보적인 학생도 이 말씀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안에 이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위의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몹시 더럽힘으로 더 이상 지상에 살도록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았으니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에다 견주어 보자.
이와 같은 가르침에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는”(데살로니가후서 2:11,12) 위험이 있다.
믿고 있는 영혼을 위한 참된 안전 보장은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의인의 길”에서 찾아보게 된다.
죄짓는 성도는 영생을 소망할 권리가 없는 반면에 순종하는 신자는 악마의 권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8.영원한 칭의는 어떤가?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그를 믿을 때, 내가 회심하는 그 날 까지의 모든 나의 죄들의 용서만이 아니라, 모든 나의 죄들은 영원히 제함을 받게 되었다”고 종종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Ironside)
즉 하나님은 과거 죄들에 대한 관계에서 그 영혼을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앞으로 짓게 될 미래의 모든 죄들도 도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한 제물이었으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이라고 말들 한다. 그 인용 성구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이다.
독특하게도 “영원히(For ever)”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것은 거룩하게 되는 자들에 대한 것이지, 과거 어떤 때에 거룩하게 되었던 자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 고의로 짓는 죄에 대한 경고가 또한 같은 장에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26절)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인용된 놀라운 경고를 알려준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29절)
또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들은 미래의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칭의의 바탕이기 때문에 우리 칭의의 한 행동은 과거, 현재, 미래의 우리 모든 죄들의 형벌에서 우리를 해결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칭의의 기초로서의 속죄와 칭의의 실제적인 적용으로서의 구속 사이에 혼란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속죄 시에 우리의 모든 죄가 미래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의 죄는 용서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의 칭의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최상이요, 영원하며, 완전한 역사를 다 마쳤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3:26)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아야할 고통의 형벌을 대신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대속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때에만 그리스도의 충족한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칭의는 법적 용서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선물을 받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직 범하지 않은 죄의 용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의 죄들이 갈보리 언덕에서 사해지지 않았다. 믿을 때 사함을 받는다.
아직 범하지 않은 죄들에 대한 칭의의 생각은 명료한 의미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는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로마서 3장에 있는 바울의 위대한 칭의에 관한 구절에서 칭의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25절)이라고 분명히 그리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의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그에게 용서를 이미 베푸셨을지라도,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들을 이 세상에서 벌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죄 짓는 면허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말들이 있다.
“당신이 당신의 구주로서 주 예수를 믿는 순간 심판의 하나님과 관계가 있었던 죄인으로서의 당신의 책임은 영원히 끝난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자녀로서의 당신의 책임은 시작된다. 이제 만일 자녀로서 당신의 아버지를 반대하여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은 신자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당신을 다루실 것이다” (Ironside) 라고 듣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죄를 용서하며, 아버지로서 죄를 벌하시는 분열된 인격체는 아니시다.
심판자로서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 준 것을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어떻게 벌할 수 있을까?
죄 짓는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기의 죄들을 고백해야만 한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성도들이 그 점에서 이미 용서받고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아, 이전에 지어본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는데,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면 죄의 자연적 결과로 따라오게 되는 것보다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고, 심지어 그의 성부에 의해서도 신자의 죄들에 대한 처벌만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성부로서의 하나님이 다소 재판자 정도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만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의 죄를 취급해야만 한다면, 온 세상의 심판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들을 다루시는 것과는 다른 면으로 자녀들을 어떻게 공정히 다룰 수 있을까? (창세기 18:25)
하나님은 우리가 회심할 때 우리의 미래를 다루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이 범하지 않은 모든 미래 죄에 대해 통털어 용서해줌으로 우리의 미래를 다루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생시키며, 성결케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이기고 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영구하면 하나님은 항상 칭의와 의를 함께 말하시지, 결코 칭의와 미래에 죄짓는 것을 합쳐 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서 5:18,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의란 죄에 의해 속박된 영혼을 버리는 어떤 상상적이며 전가된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일서 3:7에서 볼 수 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또한 베드로전서 1:15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되어 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직접적인 성경의 증거를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비록 구약성경의 가르침 전부가 율법적 논쟁에 의해 무효화 된다 하더라도, 모든 성경은 유익한 것이라고 믿는 경건한 자는 에스겔서 33:12,13,18의 심사숙고 할 것이다.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이것은 예루살렘 도시의 멸망에만 적용된다거나 혹은 여기서 언급되는 독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빈약한 답변이다.
독선에서 돌이키는 것이 이로운 행위가 아닐까?
만일 백성들이 그들의 독선에서 돌이킨다면 죽음에 대한 경고를 어째서 받아야만 했단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는 모든 세대적 한계를 넘어 있는데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에스겔 18:4,20, 참조 24,30)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마태복음 18:21-35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확실성을 잘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두 사람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되는데 많은 금액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적은 액수의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해 주기를 거절했다.
이 말씀을 보면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4절)고 했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부친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고 하셨다.
마태도 역시 궁극적 칭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태복음 12:36,37)
바울도 역시 같은 사상을 공명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로마서 2:13)
인간이 자기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복음적인 기독 신자는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데,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평(로마서 5:1)과 우리가 이미 살핀 대로 죄와는 양립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중생케 하는 은혜를 가져오는 믿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16-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
그 다음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영원히 율법의 요구를 해결하며 모든 미래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의견을 예상한 것처럼 부언하기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절)
행위 전 칭의에 대한 이론과 루터시대 때 종교개혁에 활기를 주었던 로마 교회의 사면 교리 사이에 올랄만한 유사성이 있다.
양쪽 모두가 죄는 그것이 범해지기 전에 용서함을 받게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잘못된 영원 구원 보장 사상은 로마 카토릭 주의 보다 훨씬 앞서는데, 면죄부를 사게 되는 몇 사람 정도가 아닌 모든 미래의 죄가 용서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야고보서 2장 전체는 그런 도덕률 폐지론(기독자들은 의롭다함을 보존하기 위해 도덕률을 지킬 위무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야고보는 형제들에게(1절)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9-11절)고 했다.
아브라함에 관하여도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1-24절)고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여기서 순종 대신에 믿음의 문제나 믿음 대신에 순종 문제에 대해 단순히 말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에 대해 말했다.
믿음의 순수성은 순종하는 생활의 특성에 의해 나타난다.
바울 자신은 말하기를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2,13)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1:29-32에서 바울이 말한 것을 “신자들의 죄에 대하여는 심판이 없다”는 공상을 뒷받침 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주의 만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잠자는 자가 많다”는 말을 가지고 신자가 세상에서 너무 부도덕한 생활을 하면 하늘로 데려감을 당한다는 사상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죄를 지으면 징계하시지만 그러나 그 자녀들이 세상과 함께 정죄 받지는 않는다고들 말한다.
이 모든 것은 32절에 있는 매우 중요한 한 적은 단어를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타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잘못하는 자기 자녀를 완전히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회복시킴으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1-3절)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4-6절)라고 했다.
단 한 번의 칭의가 모든 미래의 죄들을 덮어준다는 사상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성경에는 아무데도 없다.
그런 생각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며, 죄로 부터의 구원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생케 하고 성결케 하는 은혜의 한 약한 대용품으로 제공되어 오고 있다.
진정한 구원 안전 보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로마서 6:16,18,19,22)

9.세대주의에 관하여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그를 믿을 때, 내가 회심하는 그 날 까지의 모든 나의 죄들의 용서만이 아니라, 모든 나의 죄들은 영원히 제함을 받게 되었다”고 종종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Ironside)
즉 하나님은 과거 죄들에 대한 관계에서 그 영혼을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앞으로 짓게 될 미래의 모든 죄들도 도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한 제물이었으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이라고 말들 한다. 그 인용 성구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이다.
독특하게도 “영원히(For ever)”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것은 거룩하게 되는 자들에 대한 것이지, 과거 어떤 때에 거룩하게 되었던 자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 고의로 짓는 죄에 대한 경고가 또한 같은 장에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26절)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인용된 놀라운 경고를 알려준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29절)
또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들은 미래의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칭의의 바탕이기 때문에 우리 칭의의 한 행동은 과거, 현재, 미래의 우리 모든 죄들의 형벌에서 우리를 해결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칭의의 기초로서의 속죄와 칭의의 실제적인 적용으로서의 구속 사이에 혼란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속죄 시에 우리의 모든 죄가 미래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의 죄는 용서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의 칭의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최상이요, 영원하며, 완전한 역사를 다 마쳤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3:26)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아야할 고통의 형벌을 대신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대속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때에만 그리스도의 충족한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칭의는 법적 용서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선물을 받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직 범하지 않은 죄의 용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의 죄들이 갈보리 언덕에서 사해지지 않았다. 믿을 때 사함을 받는다.
아직 범하지 않은 죄들에 대한 칭의의 생각은 명료한 의미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는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로마서 3장에 있는 바울의 위대한 칭의에 관한 구절에서 칭의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25절)이라고 분명히 그리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의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그에게 용서를 이미 베푸셨을지라도,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들을 이 세상에서 벌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죄 짓는 면허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말들이 있다.
“당신이 당신의 구주로서 주 예수를 믿는 순간 심판의 하나님과 관계가 있었던 죄인으로서의 당신의 책임은 영원히 끝난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자녀로서의 당신의 책임은 시작된다. 이제 만일 자녀로서 당신의 아버지를 반대하여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은 신자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당신을 다루실 것이다” (Ironside) 라고 듣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죄를 용서하며, 아버지로서 죄를 벌하시는 분열된 인격체는 아니시다.
심판자로서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 준 것을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어떻게 벌할 수 있을까?
죄 짓는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기의 죄들을 고백해야만 한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성도들이 그 점에서 이미 용서받고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아, 이전에 지어본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는데,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면 죄의 자연적 결과로 따라오게 되는 것보다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고, 심지어 그의 성부에 의해서도 신자의 죄들에 대한 처벌만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성부로서의 하나님이 다소 재판자 정도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만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의 죄를 취급해야만 한다면, 온 세상의 심판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들을 다루시는 것과는 다른 면으로 자녀들을 어떻게 공정히 다룰 수 있을까? (창세기 18:25)
하나님은 우리가 회심할 때 우리의 미래를 다루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이 범하지 않은 모든 미래 죄에 대해 통털어 용서해줌으로 우리의 미래를 다루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생시키며, 성결케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이기고 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영구하면 하나님은 항상 칭의와 의를 함께 말하시지, 결코 칭의와 미래에 죄짓는 것을 합쳐 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서 5:18,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의란 죄에 의해 속박된 영혼을 버리는 어떤 상상적이며 전가된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일서 3:7에서 볼 수 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또한 베드로전서 1:15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되어 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직접적인 성경의 증거를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비록 구약성경의 가르침 전부가 율법적 논쟁에 의해 무효화 된다 하더라도, 모든 성경은 유익한 것이라고 믿는 경건한 자는 에스겔서 33:12,13,18의 심사숙고 할 것이다.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이것은 예루살렘 도시의 멸망에만 적용된다거나 혹은 여기서 언급되는 독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빈약한 답변이다.
독선에서 돌이키는 것이 이로운 행위가 아닐까?
만일 백성들이 그들의 독선에서 돌이킨다면 죽음에 대한 경고를 어째서 받아야만 했단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는 모든 세대적 한계를 넘어 있는데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에스겔 18:4,20, 참조 24,30)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마태복음 18:21-35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확실성을 잘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두 사람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되는데 많은 금액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적은 액수의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해 주기를 거절했다.
이 말씀을 보면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4절)고 했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부친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고 하셨다.
마태도 역시 궁극적 칭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태복음 12:36,37)
바울도 역시 같은 사상을 공명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로마서 2:13)
인간이 자기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복음적인 기독 신자는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데,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평(로마서 5:1)과 우리가 이미 살핀 대로 죄와는 양립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중생케 하는 은혜를 가져오는 믿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16-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
그 다음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영원히 율법의 요구를 해결하며 모든 미래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의견을 예상한 것처럼 부언하기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절)
행위 전 칭의에 대한 이론과 루터시대 때 종교개혁에 활기를 주었던 로마 교회의 사면 교리 사이에 올랄만한 유사성이 있다.
양쪽 모두가 죄는 그것이 범해지기 전에 용서함을 받게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잘못된 영원 구원 보장 사상은 로마 카토릭 주의 보다 훨씬 앞서는데, 면죄부를 사게 되는 몇 사람 정도가 아닌 모든 미래의 죄가 용서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야고보서 2장 전체는 그런 도덕률 폐지론(기독자들은 의롭다함을 보존하기 위해 도덕률을 지킬 위무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야고보는 형제들에게(1절)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9-11절)고 했다.
아브라함에 관하여도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1-24절)고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여기서 순종 대신에 믿음의 문제나 믿음 대신에 순종 문제에 대해 단순히 말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에 대해 말했다.
믿음의 순수성은 순종하는 생활의 특성에 의해 나타난다.
바울 자신은 말하기를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2,13)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1:29-32에서 바울이 말한 것을 “신자들의 죄에 대하여는 심판이 없다”는 공상을 뒷받침 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주의 만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잠자는 자가 많다”는 말을 가지고 신자가 세상에서 너무 부도덕한 생활을 하면 하늘로 데려감을 당한다는 사상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죄를 지으면 징계하시지만 그러나 그 자녀들이 세상과 함께 정죄 받지는 않는다고들 말한다.
이 모든 것은 32절에 있는 매우 중요한 한 적은 단어를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타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잘못하는 자기 자녀를 완전히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회복시킴으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1-3절)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4-6절)라고 했다.
단 한 번의 칭의가 모든 미래의 죄들을 덮어준다는 사상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성경에는 아무데도 없다.
그런 생각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며, 죄로 부터의 구원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생케 하고 성결케 하는 은혜의 한 약한 대용품으로 제공되어 오고 있다.
진정한 구원 안전 보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로마서 6:16,18,19,22)

10.참 안전 보장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완전한 안전을 준비하셨다. 이 안전 보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약속들이 입증하는 실제적이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딛 3:5)
이것은 믿는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지켜주는 안전보장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신앙을 고백한 후 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안전보장이 없다는 사실은 진정으로 중생한 영혼의 안전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러한 자는 결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 여러 경우에 나타나 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음으로서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마5:13) 그 이유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기”(눅 9:62) 때문이다.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 마음의 한 정당한 욕구이다.
그러나 죄와 영적인 퇴폐로 얼룩진 생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찌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 15:2)
“구주를 영접하는 일에서 떠난 인간의 행동은 구원과 관계가 없으며, 인간의 행동과 과실은 구원받게 되는 상태에서 그를 제외되도록 하지 못 한다”(J.F.Strombeck 결코 멸망치 않을 것이다 1966)고 말하는 것은 안전보장에 기여하지 못하며 단지 치명적인 추측과 거짓된 희망을 의존하도록 이끌어간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는 말씀에 “그들이 한 때 회심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덧붙여지지 않을 것이다.
죄에 돌아간 의인은 육체적으로 한번 죽을 뿐 아니라 둘째 사망에 참예하게 된다.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겔 18:26)
진정한 안전보장은 한 가지 즉 죄에 대한 자만과 관대함을 완전히 거절하는데 달려있다.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1,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이 안전보장 문제를 “안전제일”의 기초 위에 두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무조건적인 영원 구원 보장에 대한 교리는 참이거나 아니면 거짓 둘 중의 하나이다.
만일 무조건적인 안전보장이 참이라면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색하게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가 이 견해를 받아들이던지 혹은 거절하던지 간에 효력이 있다.
반대로,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면 죄 가운데 사는 타락자들은 영원히 희망이 없는 잃어버린 자들이다.
역으로, 신자들의 안전이 그의 계속적인 신앙과 순종에 좌우된다는 교리는 참이거나 거짓 둘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신앙과 순종으로 살고 있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들은 아직도 구원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옳던 그르던 간에 조직적인 기독교의 안전보장 교리를 믿고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자는 안전하다.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어떤 이론을 지지하는데 대한 또한 심각한 반대들이 있다.
영원구원보장을 가르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영원한 구원의 희망에 대한 이론 체계 안에서 가능하게 만들지라도 죄의 생활을 변호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조산아의 사망이 죄짓는 성도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훈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죄를 더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더 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그 이론을 해석하는 자들은 그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는 문외한 자라는 증거를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함축한 바를 주저 없이 따르는 한결 같은 영혼을 오직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 같지 않은가?
한편, 진정한 안전보장은 방심을 견제하고 있다. 그것은 죄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폭발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케 되는 성결한 생애로 이끌어 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겸손한 자녀가 행하는 이론이며, 그 안에서 그는 그의 이론이 참이던 아니던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이제 진정한 영원구원보장의 진로가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두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성령의 중생케 하는 역사인데, 이것에 의해 말소된 죄의 능력이 파괴되며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게 된다.”(롬 6:14)
둘째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 12:14-16)는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볼 때 성령의 보호하시는 능력은 성결케 하는 그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예수님의 위대한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15-17.20)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23,24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신자들이 내적인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벧전 1:2)으로 되는데, 이로 인해 외적인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보장되며, 증거가 계속적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잘못된 가르침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을 마비시켜 온 것은 비극이다.
그들은 로마서 7장의 괴로운 생활 안에 사는 것을 배워왔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4,15,19,21-24)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대해 그러한 제한적인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자들은 무조건적인 영원구원보장 교리 안에서의 승리의 생활을 위해서 한 대용물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마서 7:25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8:2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한 것으로 그 절정에 도달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갈라디아서 5:17에 머물러 있기를 거절하고, 갈라디아서 5:22-24까지 계속되는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구원보장 계획은 성결케 하는 성령의 원동력 안에서 역사 하신다. 이것이 내적 구원보장이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행 15:8.9)
깨끗한 생활과 헌신적인 봉사를 하게 하는 순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구원보장에 완전히 적합한 것이다.
신약성경에 있는 복음의 위대한 간추린 내용 중의 하나가 베드로후서 1:1-11에 나와 있다.
하나님의 영감 받은 기록자가 기술한 최대의 영원구원보장이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끝

Post a comment